Art Space X는 2025년 7월 1일(화) 부터 7월 20일(일) 까지 김명남 작가를 초청하여 <하얀묘법 : Écriture blanche>를 선보입니다. 이번 전시는 색을 걷어낸 자리에 송곳과 바늘 그리고 실로 빼곡히 새겨진 미세한 흔적을 통해 삶의 궤적을 언어 이전의 감각으로 풀어냅니다.
김명남 작가에게 새하얀 캔버스는 것은 단순히 빈 공간이 아니라, 존재의 시작과 끝, 비움과 포용이 공존하는 사유의 장입니다. 무의 캔버스는 어머니의 직조하는 손길에서 비롯된 유년의 기억에서 시작된 반복적이고 수행적인 몸짓으로 채워집니다. 이는 작가의 사적인 시간을 되새기고 수많은 무언의 기억들을 봉합할 뿐만 아니라 관람자에게도 각자의 기억과 감정을 투영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합니다.
<하얀묘법 : Écriture blanche>는 마치 눈 덮인 벌판 위에 남겨진 발자국처럼, 작가의 삶과 믿음, 그리움이 압축된 풍경을 선사합니다. 하얀 풍경 속에 담긴 깊은 울림은 존재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시각을 넘어 청각적·촉각적으로 던지며 관람자가 자연스럽게 작품을 읽는 대신 감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From July 1 to July 20, 2025, Art Space X presents Écriture blanche, a solo exhibition by artist KIM Myoung nam. This exhibition traces the artist’s personal journey through subtle, delicate marks created not with color, but with awls, needles, and thread—revealing a sensibility that precedes language.
For her, a blank white canvas is not merely an empty space, but a field of contemplation where the beginning and end of existence, emptiness and embrace coexist. This canvas of nothingness is filled through repetitive and meditative gestures, rooted in childhood memories of a mother’s weaving hands. These gestures not only recall the artist’s private time and mend countless unspoken memories, but also offer viewers a space in which to project their own recollections and emotions.
White Écriture: Écriture blanche presents a landscape compressed with the artist’s life, beliefs, and longing—like footprints left on a snow-covered field. The deep resonance contained within this white scene poses fundamental questions about the essence of existence. It transcends the visual to awaken auditory and tactile senses, offering viewers a unique experience where the work is not read, but intuitively received through sensation.
김명남 하얀묘법 : Écriture blanche
일본에서 옷가지 하나를 검은색으로 염색했을 때 일이다. 옷감이 하얀색이기에 막연한 생각으로 뭐 그리 어렵지 않게 검은색으로 염색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섯 번 이상 반복해 염색하고 나서야 비로소 검은색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옆에서 가르쳐 주시던 염색 장인은 이미 색이 있는 천에 그 위를 덮듯이 검은색으로 염색하는 편이 더 색이 잘 나오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셨다. 검은색은 모든 색을 합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하얀 천이 점점 검은색으로 바뀌어 가는 동안, 모든 색을 포용하는 듯 시작점처럼 보이는 하얀색은 마지막 순간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는 색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김명남은 이런 하얀색 종이에 색을 사용하지 않고 송곳과 바늘과 실이라는 매체로 흔적과 자국만을 드러내는 작가다. 색이라는 재료를 모르지 않는데, 어째서 그녀는 하얀 종이에 구멍을 내어 뚫고, 긁고, 꿰매며 작업하려 했을까? 김명남은 어느 날, 녹내장과 만난다. 소리 없는 실명이라는 이 질병은 “보인다”라는 단어를 그녀에게서 서서히 앗아가기 시작했다. 미술은 관찰에서 시작되는데, 표현에 있어 중요한 ‘시각’을 위협하는 불안함과 고민은 김명남의 두 손에서 붓과 색을 내려놓게 했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이제까지 꼭 쥐고 있었던 세계를 놓아야 하는 마음은 괴롭고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의 신앙은 삶을 되묻게 했다. 그녀는 “보인다”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했고 그 결과 두 빈손에 다른 재료를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송곳과 실과 바늘이었고 하얀색이었다. 김명남의 작업은 점자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점자는 시각 표현인 글이 촉각을 통해 나타나는 방법이다. 일반인이라고 불리는 눈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이 점자를 보면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무언가의 메시지임은 느낄 수 있다. 김명남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은 삶을 흔적과 자국으로 전달하는 일이라고. 그렇게 점자처럼 보이는 흔적과 자국은 잔잔한 감성 속으로 관객을 이끈다. 이런 관계는 “텍스트의 즐거움”이라는 책에서 롤랑 바르트가 이야기한 “저자의 죽음”을 상기하게 한다. 바르트에 따르면 작가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기 생각과 의도를 담아내지만, 그 이후에는 독자들이 자유롭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놔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방적인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니라 작품 속에서 서로를 찾고, 만나고 작품을 즐겨야 할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작품의 완성은 관객이 이루어 낸다는 점에서 김명남의 작품 속 하얀색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포용되는 시작과 완성되는 마지막을 가진 의미로 말이다. 이를 위해 그녀는 송곳과 실과 바늘을 사용했고 그 이름이 “하얀묘법“이다. “하얀묘법”은 송곳에 뜯기고 뚫린, 하얀 종이 부분과 크고 작은 구멍들이 옆으로 나란히 이어져 있다. 마치 위아래로 펼쳐진 오선지에 하나하나 음표가 적힌 듯 보이기도 하고, 책 한 페이지에 가득히 적힌 글자들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바늘을 이용해 삼베실로 표현한 작업 역시 수평으로 이어져 때로는 덩어리를 이루고 사라지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은 “에피타프(Epitaph)”라는 묘비명 시문을 연상하게 한다. 이 때문인지 문학 비평을 하는 지인에게서 들었던 ’한강‘이라는 소설가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강은 자신의 책 “흰”의 제작 배경에 관해 말했는데, 일찍 죽은 자신의 언니 이야기였다. 한강의 어머니는 24살 때 이제 막 태어난 아가를 흰 천으로 감쌌는데, 두 시간도 안 되어 숨을 거두어 버리자, 그 감싼 천이 바로 수의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다. 시작과 마지막이 공교롭게도 순백의 흰색임을 느낀 한강 작가는 그때 소설을 쓰려고 생각했다고 한다. 김명남의 “하얀묘법”도 이와 같은 느낌이다. 그녀의 작업에서 구멍 나고 뜯긴 자국은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한 장의 소설이다. 시작과 마지막이 한 면의 흰 종이 위에 남겨진 “하얀 비문(碑文)”이다.
2023년 여름 엄상섭 설치미술가
김명남 작가 노트
아무것도 없는, 어질하고, 고요한 하얀 화면 앞에 앉는다.
이 시간은 어쩌면 독백을 풀어내는 시간이리라.
삶의 모든 궤적을, 하나하나 송곳과, 바늘과 삼베실로 풀어내는 정제된 사유의 시간이다.
종이와 송곳이 만나는 순간, 또한 종이와 바늘과 삼베실이 만나는 순간들로 부터,
작업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팽팽히 긴장된 아르쉬 종이 위로 흘러나오는 보이지 않는 선율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는 사이, 내 안의 모든 사고들이 서서히 녹아 내리고,
바늘과 삼베실로 한지 위에 작업을 할 때도,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잊은 채, 시간의 흐름을 넘어 묵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기억들은 강약을 따라 음률처럼 흘러, 하얀 화면 위로 스며든다.
때로는 실로 곱게 누빈 누비처럼, 때로는 가을 들녘에서 벼를 벤 뒤의 잔상처럼,
혹은 눈 덮인 벌판 위를 지난 흔적처럼…
그런 풍경들이 또 다른 삶의 언어로, 내 작업 속에 조용히 스며든다.
어릴 적, 어머니가 베틀을 설치하시고, 삼베실을 여미며 직조를 짜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삼베천이 태어나는 그 모든 과정은, 내 유년의 깊은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직조의 개념 이상의 그 무엇이 나를 끌어당긴다.
오늘, 그 삼베실은 다시 나의 손에서 다른 형태로 태어난다.
삼베실 작업들은 어머니에 대한 오마주이며, 동시에 나의 내면이 귀결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나의 유년적, 작업하시는 어머니의 그 고요한 아름다움은 여전히 내 안에서 그리움이 되어 다시 나를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문득 ‘참 이상하다’는 생각에 머문다.
그토록 오랜 세월 고국을 떠나 있었음에도, 내 작업은 여전히 내가 태어난 대지에서 받은 기억과,
어머니에 대한 깊은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하여 말로 할수 없는 수많은 언어들이 내 작업에 정제되어 나온다.
에뜨랑제로서의 삶과 함께….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묘법(妙法).
그 위에 나의 삶을 한 땀씩 새기듯, 오늘도 나는 송곳 하나 들고,
또한 바늘과 삼베실을 들고, 하얀 화면을 향해 또 하나의 여행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