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su Yi : Pieta
Permanent Installation

이민수 작가는 대형 조각을 창작한다. 순수 예술 정신을 지키며 오랜시간 지속된 인간 근원에 대한 탐구와 고민, 체험을 통해 작품을 완성한다.  


중력으로부터 에테르에 이르기


1, 중력으로부터 순간으로


우리가 젊어서 처음에 만났을 때 그는 계단 맨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래에서 올라가던 나를 보자 곧 계단을 내려와 내게 다가왔다.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던 그때 그의 첫 모습은 우연한 일이었지만, 이후 그가 들려준 산꼭대기에 거대한 칼을 띄우고 싶다는 이야기와 함께 늘 그를 따라다녔다. 그의 꿈은 모든 것을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중력이라는 힘 때문에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작업은 중력을 뛰어넘는 일이 되었다.


그것은 소년의 꿈처럼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무지개가 아니라, 몸이 받는 그대로의 중력과 숙명적으로 대면하는 일이었다. 그의 작업이나 그가 작업해온 방식은 시지푸스(Sisyphus)의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시지푸스는 제우스로부터 벌을 받아 뾰족한 산꼭대기에 바위를 올리지만, 바위는 매번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그의 형벌을 무한히 반복시키는 것은 중력이다. 카뮈(Camus)에 의하면 시지푸스는 자신의 숙명을 알고도 그 일을 끝없이 반복함으로써 결국 숙명을 뛰어넘는다. 이민수 역시 진흙들을 산같이 뭉쳐서 거대한 인간의 형상을 빚지만, 그것은 질료 자체의 숙명적 질량에 의해 늘 아래로 무너져 내리려는 중력의 도전을 받는다. 그는 그러한 힘에 굴복하지 않고 무게들이 서로 상응하는 형상을 딛고 팽팽한 균형을 이루어 허공을 지탱하는 순간(Moment)까지 공을 들여 흙을 쌓아 올린다. 그러한 사투 끝에 거침없이 달리는 웅장한 다리들이 빚어진다. 그것은 온 힘을 다하여 질주하는 거대한 다리들이 이루는 순간의 형상으로서 덩어리들이 이루는 힘과 무게를 질료의 배분으로 응축시킨 인간 의지의 추상이다. 그가 흙덩이를 이겨 허공에 빚어 올린 구조물은 달리는 다리들이 극적으로 드러내는 확대된 순간의 언어이자 아주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인간의 눈에서 무심코 빠져 달아나는 시간의 에테르(Ether)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중력의 강을 빠져나가는 시간의 질주이다. 그것은 끝없이 달려서 지금 바로 여기에 묶인 시간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의 횡단면이며, 그 의지의 힘으로 중력의 지배를 벗어나는 순간(Moment)의 드러남이다. 사진이 발명된 초기에 머이브릿지(Muybridge)와 마레(Marey)는 사람이 달리는 순간을 연속사진으로 포착하였지만, 그들이 잡아낸 것은 다만 움직임의 밋밋한 그림자일 뿐이었다. 이민수의 달리는 다리(Moment)는 오로지 중력을 벗어나 달리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가 초래하는 힘과 속도를 무한히 증폭시켜 곧 이어질 다음 순간까지 하나의 시공에 복합적으로 현시(顯示)하는 살아있는 움직임을 구현한다. 생각하는 머리나 박동하는 심장도 없이 오직 질주하는 순간만이 현실(Reality)이라는 작가의 말은 그가 순간이라는 시간의 무중력 지대(地帶)에 담고자 하는 추상 본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크기라는 것은 상대적이다. 그것은 대개 일정한 거리에서 관찰하는 인간의 눈에 반영되는 감각으로 나타난다. 어떠한 덩어리이든 크기는 그것을 다루는 상대에 따라작아 보일 수도 있고, 커 보일 수도 있다. 그것이 맨눈으로 크게 느껴진다면 대개는 인간의 몸에 비례하여 그렇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사람이 기준이 되는 공간에서 사람이 육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크기와 무게는 한정되어 있다. 그러기에 사람의 힘과 시선의 범위를 한참이나 벗어나는 대상은 우선 인간이 가진 힘을 해제하고 시각적인 경외감을 준다. 그렇게 그것은 크기와 무게로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곳에서 인간의 의지를 도발한다. 인간은 꿈과 의지를 통해 그것을 다스리려 한다. 마치 골리앗 앞에 홀로 맞선 젊은 다윗이 손에 쥔 자그마한 돌멩이처럼 예술가의 꿈과 의지의 현신(現身)인 한 줌 한 줌의 흙으로 이민수가 빚는 인물은 작업공간을 한껏 채우다 못해 늘 공간을 허물고 시선의 경계 밖으로 뛰쳐나가려 한다. 그렇게 꽉 찬 절정의 순간, 그것은 중력을 돌파하여 무중력의 허공에 멈춘(Moment) 꿈의 시간이다.


2. 중력으로부터 높은 곳으로


정상에 큰 칼을 띄우고 싶다는 높은 산의 꿈을 위해 그는 우선 산이 올려다보이는 낮은 자리로 가야 했다. 그는 오랫동안 멀리 높은 산들의 연봉이 바라보이는 낮은 호숫가에 옛 양계장을 빌려 마련한 허름한 작업공간에서 육신의 힘이 쇠진하도록 오로지 흙과 쇠와 불을 다루며 꿈을 꾸는 예술가로서 살아왔다. 꿈과 욕망은 중력을 상쇄하는 반중력이다. 중력은 모든 물체를 낮은 곳으로 끌어내리지만 꿈과 욕망은 그것을 다시 높은 곳으로 띄워 올린다. 그에게 있어서 무엇인가를 높이 띄우는 요인은 중력 자체인지도 모른다. 중력은 예술가인 그에게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꿈과 욕망을 심어 중력에 반발하는 상승 의지를 싹틔웠기 때문이다. 생명체들은 본래 자신이 있던 아랫자리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려 한다. 식물이나 나무들은 언제나 위를 향하여 자라고 곤충들은 땅속에서 지상으로 나와 나무를 타고 위로 올라가 종국에는 날개를 달고 비상을 한다. 해바라기의 향일성(向日性)은 높은 곳에 있는 태양을 우러르는 식물의 극적인 의지를 보여준다. 이 모든 움직임의 형태는 중력의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예술가의 자유에의 의지와 같은 차원에서 움튼다. 위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가벼워야 하기에 중력이 미치는 영토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될 수 있는 한 중량을 버리고 자유로워지려 한다. 그러한 욕망을 거스르는 형벌을 내리기 위해 제우스는 아틀라스에게 지구를 떠받치고 살도록 한다. 아틀라스의 신화는 무거운 책임감을 지닌 숙명과 함께 살아야만 하는 인간을 상징한다. 


이민수가 빚은 거인 중에는 서로 엉켜 있는 가운데 돌연 상대를 떠메거나 껴안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모습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에게 부과된 숙명적인 중력에 더하여 타자의 무게까지 짊어진 엄청난 임무를 기꺼이 돌파하려 한다. 이는 마치 짓누르는 모든 업(業)을 한껏 짊어지는 만큼의 추진력을 얻어 더 높이 상승하려는 의지의 반영인 듯하다. 한정된 시간과 공간을 사는 인간의 모습을 한 이러한 거대한 형상들은 또한 자체의 물리적인 무게를 딛고 균형을 획득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단단히 엉켜 있다. 그것은 더 나아가 서로 반발하는 상대적인 힘을 받아들이는 개체들의 결속으로 응결되어 종국에는 다각적인 힘과 지체들로 뭉쳐진 하나의 덩어리로 화(化)한다. 이러한 형태적 변용의 과정은 조각가 이민수에게 잠재되어 있던 추상에의 의지로서 자연스럽게 형상으로부터 빠져나와 형상의껍질을 거쳐 본질적인 에테르로 이행(移行)하는 여정이 된다.

Shell-mercy 비 (悲) 2019 263×226×186cm, frp.
Shell-mercy 비 (悲) 2019 263×226×186cm, frp.
Shell-mercy 비 (悲) 2019 263×226×186cm, frp.
Shell-mercy 비 (悲) 2019 263×226×186cm, frp.
3. 중력으로부터 부재의 블랙홀로


형상으로 뭉쳐진 덩어리는 안으로 다져질수록 내적인 구심력을 얻어 마침내 그가 그러한 형상들을 빚었던 질료들의 덩어리로 되돌아간다. 형상을 탈피한 질료의 덩어리는 스스로의 응력에 의해 연소하고 용해되어 흘러내린다. 급기야 그것은 기화되어 다시 수직으로 상승하는 영혼의 껍질이자 허물(Shell)이 된다. 그것은 형상의 어렴풋한 기억을 너울처럼 부풀려 두둥실 떠오른다. 이 허물들은 물질들이 에테르로 기화하기 직전의 모습으로 형상의 중력을 벗어나 떠오르는 부재의 블랙홀이다. 그것은 어딘가 높은 차원으로 떠나기에 앞서 이곳의 삶에 대한 미진함을 달래고 풀어주기 위해 끊임없이 어스름한 숲속을 부유하는 영혼의 매개물로서의 통로이다. 


인연(Nidana)은 형상을 길고 둥근 순환의 호흡으로 연장하여 하나의 원으로 결속한다. 두 개의 상보적인 존재와 힘이 서로 만나 이루는 하나의 원은 시간 속에서 소용돌이를 이루며 심연을 낳는다. 두 기둥이 하나의 공간에서 화해하듯 깊은 인연을이어서 흐르는 시간은 서로의 삶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나선형(螺旋形)으로 휘돌아 감기는 줄무늬로 새겨놓는다. 이 시간의 나선(螺線)은 예술가가 인연을 통해 현실적 존재의 중력을 몽상적 부재의 블랙홀인 무중력의 차원으로 바꾸어가는 나선적(螺旋的) 리듬의 궤적이다. 그것은 두 존재가 만나 이루는 화음을 따라 새겨진 인연의 숨결이다. 두 존재가 이루는 하나의 원 속에서 중력은 상쇄된다. 중력이 무화(無化)된 망망한 꿈처럼 그 원(Circle)은 침묵하는 우주 속에서 예술가의 사유의 고리(Circle)가 되어 삶의 무게를 벗고 자유로이 회전하는 원심력을 따라 상승하고 날아오르는 무중력의 시공이자 젊은 꿈을 속박하던 중력에서 풀려나는 형상 부재의 블랙홀이다.


4. 허물로부터 에테르로


몸을 베일로 가리는 일은 오히려 몸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것은 몸의 요란한 치장을 생략하는 대신에 몸의 겸허한 경계만을 부각함으로써 몸의 본질을 현시(顯示)한다. 온전히 가리고자 하는 의지가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그것은 사람들의 피상적인시선에는 쉬이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실체의 열린 상상력과 마주하게 한다. 이민수는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Shell The Last Supper)이나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피에타상(Shell pieta)처럼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할 구원자의 성상을 백색의 허물(Shell)로 감싸 윤곽만을 남겨둠으로써 시각적 차연(差延, Différance)을 통해 불확정적인 자리에 돌려놓음으로써 그 이미지들을 처음 대하듯 새로이 만나게 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이미지를 억압해온 유럽의 성상파괴주의와, 그와는 반대로 이미지의 범람을 야기한 그들의 성상옹호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이미지의 진정한 아우라를 되찾아주는 작업이다.


이민수의 작업은 이처럼 실체를 감추는 동시에 드러내는 허물(Shell)로써 날고(Shell fly) 추락하고(Shell falling) 사랑하고(Shell love) 꿈꾸고(Shell dream) 업을지고(Shell karma) 인연을(Shell nidana) 만들어가는 삶의 다양한 곡면을 감싸는 경계의 굴곡을 펼친다. 그것은 작가가 꿈꾸며 이어온 삶의 주름 속에 새겨진 뜨거운 리듬으로 남겨진다. 이러한 리듬의 주름은 중력으로부터 시작하여 중력의 무게를 딛고 떠오르는 에테르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빛의 은하처럼 이어주는 궤적이다.



글: 서길헌(조형예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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